이번 과제는 스스로 정주인원을 설정하고 그들을 위한 주택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과제 2의 사이트였던 간데메 공원 주변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그곳엔 총 3개의 사이트가 있었다:
공원과 사이에 도로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이트 A,
공원 맞은편에 위치하여 삼면이 도로에 접한 사이트 B,
그리고 공원 안에 위치한 사이트 C.
사람들의 만남이 잦고 특히나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에 주택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이 장소엔 상당히 많은 스트레스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원 놀이터와 편의점에서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말소리, 가끔 도로 위를 주행하는 차들의 존재에 더불어 일반적인 주택의 층수를 웃도는 4~5층의 건물들까지 나의 신경이 쓰이는 요소는 다양했다.
이전에 탐구했던 아홉칸 집의 분위기와는 상반된 공간에 온 듯 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산골짜기에 위치하여 시야와 감각이 탁 트인 듯한 아홉칸 집이 그대로 이곳으로 옮겨진다면, 기억과 행동의 열림을 이끌어내는 그 본질은 원치 않는 외부요인을 무분별하게 안으로 들이는 원인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시작하기 전부터 상정했던 것은 이 주변의 상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었다. 바깥의 스트레스를 막아내고 안에서는 스트레스를 걸러낸 주변의 공원과 하늘, 채광을 즐길 수 있는 주택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에 걸맞는 사이트는 A가 유력했다. 도로와 외부인의 왕래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공원을 관망하는 것과 채광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정주 인원이었다. 간데메 공원 일대는 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동네와 분위기가 비슷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가 사는 주택으로 설정하려 했다. 실제로 노인들이 많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언젠가부터 할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것처럼, 부모님에게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이런 가정은 언젠가 해체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지금 때때로 할머니 댁에 들르는 것처럼 방문을 통해 조부모와 관계를 유지하는 손자 손녀들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정주 인원은 노부부로 범위를 좁혔다.
여러 조사를 통해 노인의 특징을 살펴보기도 했는데, 가장 눈여겨 본 것은 이들의 고립 문제였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관계망이 좁아지고 신체의 제약으로 인해 외부 활동이 줄어들며 서서히 고립된다.
이들의 고립은 그것을 일으킨 원인과 그로 인한 결과와 더불어 이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원인이다.
하기 힘이 들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혼자여서, 이들의 행동은 닫힌다.
나는 앞선 과제 1에서 아홉칸 집의 본질은 ‘열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열림을 통해 더 많은 행동이 그 집에 자리 잡을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이들은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인즉슨 행동은 행복의 재료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행동의 제약은 불행의 씨앗이다.
사람은 한 공간 안에서 원하는 행동을 자유로이 하며 무엇보다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저번 과제를 통해 깨달았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주변 환경과 정주인원을 고려해 한 주택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것이 내가 그 당시 생각한 다음 과제의 목표였다.
여기서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를 설정했다.
이 주택은 노인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경험의 핵심은 타인과의 교류이다.
노부부는 두 젊은이와의 코하우징(별도의 주택에서 생활하며 공용공간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주거방식)을 하고, 가족이나 여러 손님을 맞이하며 고립으로부터 거리가 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원치 않는 외부 요인은 차단하면서도 공원의 경관과 남쪽으로부터 비치는 햇빛, 빌딩에 가려지지 않은 하늘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외부의 시선, 소음, 등은 자유로운 행동에 제약을 건다. 이것을 극복하고 주변의 매력은 챙기기 위함이다.
쉽게 말해, 원하는 것들을 보며 원하는 이들과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집이다.
정주 인원은 다음과 같다:
1. 할머니
70대 중반
사고로 인해 휠체어 사용
취미는 독서와 요리
2. 할아버지
70대 후반
직업은 목수.
취미이자 업무는 가구 제작 및 디자인
3. 청년1
20대 초반 대학생
4. 청년2
20대 후반 회사원
주택의 전체적인 매스는 ‘공용공간을 사이에 두어 구획된 노부부와 청년들의 생활공간’이란 컨셉에서 발전했다.
노부부, 특히 휠체어 사용자인 할머니를 고려하여 층고는 높을 수 없었다. 최대한 낮을수록 이들의 움직임은 편할 것이다.
그에 반해 청년들은 비교적 수직 이동에 구애받지 않는다.
낮은 매스는 노부부의 생활공간, 높은 매스는 청년들의 생활공간으로 설정했다.
다음으로 고려한 것은 외부요인을 걸러내는 것이었다. 집중한 것은 시선이었다. 이는 실내 활동에도 영향을 주지만, 중정에서 일어나는 실외 활동에 큰 제약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상 레벨에서 행인들과 마주하는 것, 사이트 주변의 고층건물로부터 내려다보이는 것. 이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높은 매스를 블록 안쪽으로 배치해 위로부터의 시선을, 내부 공용공간인 낮고 긴 매스를 공원쪽으로 배치하여 지상 레벨에서의 시선을 걸러내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배치는 두 생활공간의 채광 확보에도 유리하다.
매스스터디에 맞춰 병행한 것은 프로그램과 평면을 대응시키는 것이었다.
우선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램프는 기울기가 최대 1/12로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였기에 램프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중요했다
램프는 공원 쪽 도로로부터 거리감을 확보하기 위해 서쪽 면에 길게 배치하였고 나머진 최대한 짧은 길이로 필요에 따라 배치하였다.
청년들의 생활공간을 제외하면 이 주택에서 레벨체인지가 있는 공간은 공용공간인 서재와 중정, 그리고 노부부의 침실이다.
서재는 그 안에서 남쪽으로 바라볼 때 외부의 건물이 하늘을 가리는 면적을 줄이고자 시점을 아래로 낮춘 것이고, 중정은 서재와 같은 이유와 더불어 미묘한 공간의 구획을 꾀하고자 레벨을 낮췄다. 노부부의 침실은 채광을 위해 반층(1200) 높였다. 이는 공용공간이 위치한 1층과 구분감을 주고, 바로 밑에 그들의 집에 찾아온 가족, 혹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공용공간인 서재, 중정, 커뮤니티 키친은 노부부의 생활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반면, 청년들의 원룸과는 실외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어 평소엔 노부부가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청년들이 이 공간에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도록 의도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원룸으로 돌아올 때 오르는 계단과 중정과 서재로 내려가는 한 두단의 계단, 커뮤니티 키친으로 향하는 현관은 서로 인접하다. 이들이 큰 수고로움 없이 공용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청년들의 원룸은 채광과 경관에 최대한 공평할 수 있도록 서로를 가리지 않게 배치했다. 또한 층간소음을 최소화하고자 서로 엇갈리게 쌓아 올렸다.
할아버지의 작업실은 별채로, 중정 안에 위치한다. 목재를 운반하기 쉽도록 남쪽 변에 위치한 주차장에서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하였고, 지상 레벨과 중정 레벨을 아울러 작업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할아버지의 목공 작업이 혼자만의 일이 아닌, 함께하는 활동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공용공간인 중정과 붙어 있어 청년들과 함께 가구를 제작하거나 직접 만든 가구를 임의대로 중정에 배치해 다른 이들과 함께 체험해 볼 수 있다.
할머니의 주된 생활공간인 서재와 커뮤니티 키친도 비슷하게 공용공간의 역할을 수행한다. 서재엔 할머니와 청년들이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커뮤니티 키친에선 같이 요리하고 밥을 먹으며 혼자만의 취미 생활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정주 인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프로그램만이 다가 아니다. 이 주택은 정주 인원의 친지가 자주 방문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중정과 커뮤니티 키친, 그리고 침실 밑의 게스트룸의 존재 덕이다. 경우에 따라 서재도 활용될 수 있다. 두 개의 주출입구가 있어 상황에 따라 실외에서 실내, 실내에서 실외로의 방문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손님의 자유도를 높이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노부부의 가족은 실내로 들어서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할아버지의 가구를 보러 온 손님은 곧바로 실외로 들어서서 작업실과 중정에서 가구를 체험할 수 있다.
이 주택의 목표인 다양한 경험과 자유로움은 커뮤니티 키친, 중정, 서재로 구성된 공용공간에 드러난다.
각 공간은 높이, 실내외 여부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구별된다. 그렇기에 각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경험은 서로 다르고, 또 다양하다.
그러나 이 경험들이 서로로부터 유리된 것은 아니다. 서로에게 ‘열려있기’ 때문이다.
아홉칸 집은 아홉칸의 격자 사이로 난 통로를 통해 시각과 행동이 열린다.
통하여 볼 수 있고, 바로 방 사이를 이동할 수 있도록 접근성이 뛰어나다.
각 방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기억으로 남는데, 열린 시각과 행동으로 재생산된 기억과 영향을 주고받고 더욱 다양화된 행동들로 이어진다.
원리에 따르면, 행복의 재료가 늘어나는 것과 같다.
아홉칸 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이 아닌 남들이 공유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열리는 정도를 조절해야 했고, <행동-기억-행동재생산>의 시작점인 ‘시각의 열림’에 그것을 국한했다.
각 공유공간에서 다른 공유공간으로 곧바로 이동할 순 없지만, 시각적으로 열려 있다. 서로 유리를 통해 하나씩 보이기도 하지만 이 공간들이 한 눈에 보이기도 한다. 침실 쪽의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하늘을 다 함께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시각의 열림에 기여한다.
이는 아홉칸 집의 원리를 조금은 느리고 거리감이 있는 방식으로 차용하는 것이다.
노부부와 청년들은 서로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고, 여러 켜를 걷어내며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기억은 쌓이고 행동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재생산을 거듭한다. 눈에 밟히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함께 행동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고, 이 과정을 거듭하며 유대감을 쌓아갈 수 있다. 그리고 함께 행동하며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이 기억들은 공간에도 깃들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행동을 넓혀나갈 수 있다. 하나의 행동을 한 공간에만 가두지 않고 뻗어나가게 할 수 있다. 더 많은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그리고 공간과 유대감을 쌓으며 할 수 있는 행동이 많아진 노부부가 느끼는 감정은 다양할 것이고, 자유로울 것이다.
이 주택을 설계하면서 줄곧 생각해온 장면이 있다. 주변의 빌딩과 간데메 공원은 아름다움만을 남긴 채 차분한 배경으로 깔리고, 노부부와 청년들, 그리고 가족과 손님들이 주택을 오가며 다채로운 일들을 해나가는 모습. 그 장면을 위해 이 주택을 설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