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칸 집은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띤다. 아홉의 격자에 난 스물 넷의 개구부. 그것이 아홉칸 집의 형태이다. 공간의 형태만으로는 그 본질에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때문에 안에서 벌어지는 삶에 집중했다.
집이 완공되고 가족(에이리가족)이 들어서서 생활한 지 몇 달이 지나, 그들은 이 집의 설계자와 함께 아홉칸 집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 책을 통해 집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나름 알아갈 수 있었다. 깨달은 점은 그들의 삶은 나의 삶과 달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행복했다. 정확히는, 그들은 집 안에서 집 덕택에 행복했다. 나도, 우리 가족도 다른 모두도 행복을 느끼지만, 우리 모두가 집 안에서 집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것인가? 아홉칸 집의 핵심이 있다면, 이 차이는 그 핵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핵심이 아홉칸 집의 본질로 이어지는 열쇠일 것이다.
집이 사람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요소. 이를 알아보기 위해 공간의 특성, 그것이 사람에게 주는 인식, 나아가 그것이 행복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중점적으로 나의 본가(3인가구), 나의 자취방(혼자), 그리고 아홉칸 집(4인가구)을 나/에이리가족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책의 한 구절을 계속 의식했다. '집은 행복으로 채워나가는 것' 책에서 명시적으로 행복과 집을 연결한 문장이었다. 그렇다면 집을 채우는 것이 행복과 관련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표준적인 3~4인가족이 가질 것으로 예상되는 생활양식을 반영한 본가의 평면구조는 집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채워져 있다. 이는 하나의 공간에서 보이는 광경에서도 드러난다. 현관에서 보이는 광경, 침실에서 보이는 광경 등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의도한다. 마치 이곳에 티브이를 두고 저기엔 소파를 두라는 식으로. 시선이 반강제적으로 행동과 생활양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방의 구조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개구부는 한두개에 불과하며, 이는 행동의 반경마저 하나의 방으로 제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람들은 대개 시선이 열린 공간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우리 가족은 우리 마음대로 공간을 채울 수 있었을까? 이렇게만 생각해보니 내가 본가에서 행복을 느낀 경험은 거의 없는 것만 같게 느껴졌다.
자취방은 원룸이었기에, 시선과 개구부에 관한 분석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본가와 다르게 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스스로 설계해야만 했다. 스스로 루틴을 짜고 필요한 것으로 방을 채워나가야 했다. 탁자를 사서 그것을 이리저리 옮기며 식탁으로 쓰고 책상으로 썼다. 내가 공간을 채워나가며 그것으로부터 내 행동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집에서의 행동이 한 가지씩 뻗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경험 상, 이것은 행복의 출발점이었다. 행동이 새로 생겨나는 것. 따지고 보면 본가에서 이 경험이 결코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요리를 알려주셨을 때, 아버지가 새로 사오신 운동기구로 같이 운동을 했을 때, 내가 사온 새 책을 침대에서 읽었을 때. 이 기억 또한 나에게 집에서의 또다른 하나의 행동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물리적 실체를 두고 그것만이 이 작용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는 없다. 물리적 실체로 생산된 행동이 기억을 생산하고, 그 기억이 행동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 실체가 그 자리에 없어도 행동은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이 많을수록 행복이 커질 수 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람은 행복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동과, 행동이 만든 기억이 있어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이것들로부터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경우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경우엔 새로운 행동으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똑같든, 새롭든 행동이 새로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작용이 멈추면 행동이 멈추고 기억이 그칠 것이다. 곧 행복의 가능성이 닫힌다. 이는 다른 말로, 행동이 많아지고 기억이 많아지면 행복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는 행복의 가능성이 커진다. 왜냐하면 행동은 곧 행복의 재료이기 때문이다. 행동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행동이 제한된다면 행복이 줄어드는 것은 맞다. 그만큼 행복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돌아올 수 있다. 자취방에서 나는 물리적으로 공간을 채우며 행복을 느꼈다. 본가에서 나는 물리적으로 공간을 채우는 경험은 적었지만, 행복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으로 얼만큼 공간을 자유롭게 채울 수 있는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집의 행복에 대한 기여도는 행동을 거주자의 임의에 따라 생산해낼 수 있는지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집을 행복으로 채운다는 의미는 그만큼 행동으로 채워진다는 의미가 될 여지가 있다. 이를 토대로 아홉칸 집을 분석해보았다.
아홉칸 집은 아홉의 격자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 두 칸을 주방과 화장실로 할당한 것 외에는 모든 방이 같은 면적, 유사한 형태이다. 또한 각각의 방은 다른 방들과 시각적으로 열려있다. 본가가 사람에게 강제하는 시선과는 달리, 이는 보는 입장에서 선택권을 준다. 본가와 아홉칸 집의 명확한 차이다. 사람들은 시선이 열린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행동을 하게 되어있다. 행동은 기억을 낳고 기억은 행동을 또다시 재생산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행복을 향한 발판이 된다. 지난 분석에서, 그리고 내 경험에 입각해서 도출해낸 이 기본적 원리를 아홉칸 집에도 적용해보았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아홉칸 집에 깃든 행동과 기억은 하나의 벽에 갇히지 않고, 방과 방 사이를 너머 더욱 다양한 범위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행동 양식은 하나의 방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방을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여러 방에 걸쳐 식사를 하고, 문 없는 방들 사이로 음악을 흘려보내 춤을 추기도 했다. 에이리가족의 이러한 차별화된 생활 양식은 내가 그들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만든 계기였다. 이들이 나보다 집 덕에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행복의 원리에 입각한다면, 나와 달리 그들은 그들의 집에서 더 많이 그들의 바램대로 행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아홉칸 집이 거주자들에게 행복을 안겨준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홉칸 집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이 '본질'에 대해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저 특별한 점, 혹은 하나의 건축 요소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 또한 인간의 행동이라고 본다 즉, 집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어야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집이 본질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어떠한 집의 본질은 단순한 특이점이 아닌, 그것이 집의 본질을 어떻게 쟁취했는가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아홉칸 집의 본질은 '열림'이다. 아홉칸 집의 열린 시각으로 그 안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 방을 넘는 의미와 범위를 지닌 행동과 기억을 갖게 한다. 이는 곧 가족구성원 모두의 행동반경과 행동의 다양성을 키우고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행동을 함께하도록 만든다. 이어서 사람과 사람 간의 유대감을 증진시키고 서로 함께하는 행동의 폭이 넓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마찬가지로 공간을 넓게 쓰기 시작하면서 공간과의 유대감 또한 커지기에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행동을 향유하게 한다. 아홉칸 집의 이러한 특성은 <행동-기억-행동재생산> 의 과정을 더욱 광범위하고 세심하게 조정하여 결과적으로 행동의 밀도와 다양성을 높인다.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 행복에 기여한다. 이것은 곧 아홉칸 집이 집으로 불리게 하는 아홉칸 집의 확실한 본질이다.
이제 '열림'이란 개념을 시각화해야 했다. 그러나 열림이 이 모든 과정의 시작점인 '시각의 열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열림은 아홉칸 집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시선의 열림, 행동의 열림, 가능성의 열림. '열림' 시선의 열림은 다른 방에 대한 접근성이 늘어난 것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시선이 곧 행동의 촉매고, 이는 시선으로 하여금 접근성이 늘어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행동의 열림은 뻗어나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방과 방 사이를 넘어 다양한 양식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홉칸 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열림은 전체적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홉칸 집은 시선, 행동을 너머 심리, 관계 등 다양한 것들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와중, 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는 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빛은 후레쉬 등을 통해 임의로 조절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어떠한 형태로 가변하는 그림자를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 모든 것을 구성하는 요소인 콘크리트와 사람들을 각각 빛이 안통하는 폼보드와 빛이 통하는 아크릴로 표현하고자 했다. 폼보드로 아홉칸 집의 모형을 만든 후, 사람을 시각화한 아크릴을 사이 사이에 끼워넣어 시선의 열림을 표현한다. 사람은 행동과 기억으로 분리해 표현하며, 기억은 가족 구성원마다 구분이 가도록 색아크릴로, 행동은 홀로 하는 행동과 함께하는 행동 모두를 표현할 수 있도록 색이 비쳐보이는 투명아크릴로 정한다. 색아크릴은 늘어난 접근성을 표현하기 위해 방과 방 사이인 벽에 끼워넣고, 몇몇 색은 겹치도록 하여 그들의 기억이 따로일 때와 함께일 때를 표현한다. 또한 투명아크릴과 인접하게 붙여 행동이 기억을 생산하는 원리를 시각화한다. 투명아크릴은 벽 옆에 붙어 벽에 붙은 색아크릴의 색을 반영하도록 하고 방과 방 사이, 방 내부 등 다양한 공간에서 불규칙적으로 뻗어나가도록 한다. 이는 또한 기억이 행동을 재생산하는 원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모형을 만들고자 했고, 여기서 빛을 추가한다. 빛이 한 방향에서 모형을 비춘다면 폼보드로 막힌 부분은 검은 그림자를, 아크릴로 막힌 부분은 색이 있는 그림자를 바닥에, 그리고 투명 아크릴에 비출 것이다. 이는 각 방의 상황에 따른 기억과 행동의 차등을 나타내며, 벽을 뚫고 아크릴 너머 빛이 보임으로써 시선의 열림을, 투명아크릴이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동시에 다양한 색을 입으며 행동의 열림을 표현한다. 또한 빛의 방향에 따라 모형에 지는 그림자의 형태와 색이 달라지며 시각, 행동을 너머 심리와 관계의 열린 가능성 등을 시각화한다. 나아가 벽을 관통하는 빛과 색그림자를 통해 아홉칸 집에 깃든 행동과 기억이 통상적인 범위를 초월함을 나타낸다
이는 모형으로 표현하지 못한 연출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비치며 각 가족구성원을 상징하는 색들(빨강 노랑 파랑)이 다른 방향으로 겹치고 뻗어나가며 다양한 행동과 관계, 시선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표현했다.
이는 행동과 기억이 서로를 재생산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액소노메트릭이다
주택, 나아가 건축을 추상화한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건축물을 역추적하는 과정이었다. 건축가의 의도는 건축주의 행복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건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추상화의 끝엔 모든 건축물이 동일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건축물의 본질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그것을 건축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그동안 오직 아홉칸 집만을 생각해왔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지를 정립한 순간, 위험하게도 나는 그것이 건축의 정답인줄 착각하게 되었다. 이토록 방의 경계를 허물고 가족관계를 회복하고 행동의 반경을 넓혀주는 건축은 모든 주택의 이상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닫힌 건축은 나쁜가? 교류가 없고 공간구조가 단순하고 건축가의 의도로 가득 찬 건축은 나쁜 건축인가? 그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건축물의 본질은 달라질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내가 정립한 원리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 열림이 본질인 건축이 불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 즉 본질을 얼마나 잘 구체화하는지이다. 사람과 상황에 맞게 건축물의 본질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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