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큐브'의 발견
수백당의 '비움'의 키워드가 어떻게 구상화 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큐브'를 발견하였다. 큐브의 개념은 미술의 모더니즘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미술에서 '추상'의 개념은 곧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음'이다. 모더니즘 등장 이전 고전적인 미술은 어떤 것을 '어떻게 가리키느냐'에 중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추상적인 표현 양식이 등장하였다. 추상 미술에서 빨간 붓터치는 어떤 것을 시각적, 직관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수백당을 구성하는 실들도 이 같은 맥락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일반적인 주택들은 방 내부의 가구의 크기, 수에 따라 방의 크기, 형태 등이 결정된다. 기능주의가 원칙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당의 방들은 가구가 별로 없고 아주 휑하다. 또 한편으로 가구의 수와 부피에 관계없이 방의 크기가 비슷비슷하다. 이를 통해 건축가가 수백당을 구성하는 방들이 각각 어떤 기능으로 특정되는 것을 지양하고자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추상화 아이디어를 처음 구축하는 과정에서 수백당의 이 같은 특징을 발견하였고, 수백당의 각각의 방들을 서로 구별되지 않는 '큐브'로 치환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래는 이 생각을 구상화한 다이어그램이다.
2. 한옥의 모티프; 브릿지에 대한 탐구
한편 수백당은 건축가가 한옥의 모티프를 차용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묻어나는 주택이다. 특히 서쪽의 작업실은 한옥의 창호지 바른 문과 쪽마루, 그리고 쪽마루를 덮는 캔틸레버까지 한옥의 모티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서쪽의 작업실 외에 동쪽의 생활 공간에도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한옥의 구조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실내의 방과 방을 연결해주는 통창이 달린 좁은 복도, 즉 브릿지가 그것이다. 수백당에서 복도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동시에 방과 방 사이에 적당한 갭을 만들어 준다. 이는 한옥의 대청마루의 역할과도 유사하다. 대청마루는 실내의 칸과 칸을 연결하는 동시에 외부의 환경에 개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실내와 실외의 구분이 모호한 공간이다. 칸과 칸 사이에 실외의 영역을 들여놓는 것이다. 수백당에서 방과 방 사이의 갭은 건축가로부터 버려진 공간으로 남지 않고, 작은 마당이 들어와 있는 공간이 되었다. 수백당의 방과 방들은 브릿지가 만들어낸 갭을 사이에 끼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아래는 한옥의 대청마루와 방의 관계에 대해 간단하게 표현한 다이어그램이다.
3. 마당에 대한 탐구
아이디어를 마무리하기 위해 수백당을 더 자세히 관찰한 결과, 수백당을 생활 영역과 프라이빗한 작업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에 언급한 서쪽의 작업실과 작업실을 둘러싼 두 개의 마당이 후자이고, 방과 부엌, 침실들이 있는 이외의 영역이 전자이다. 수백당의 평면도를 살펴보면 굉장히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생활 영역과 동쪽의 작업 공간 사이에 또 다른 '브릿지'가 있다는 점이다. '브릿지' 때문에 두 영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적당한 갭이 있어서 공간이 분리된다. 이에 더해서 브릿지는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는 진입로만 조금 남겨 놓고, 시야가 차단되는 높이의 담으로 한 쪽이 막혀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다른 입구가 보이는 방향이다.) 때문에 작업실 북쪽의 마당은 굉장히 프라이빗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 같은 두 영역의 분명한 구분을 발견하고, 두 영역 간에 서로 구별되는 특징적인 성격이 있는지도 이어서 탐구한 결과 두 영역의 정체성은 각각의 영역에 포함된 마당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서쪽의 생활영역에 포함된 마당들은 실내의 영역과 구분되어있다. 마당을 둘러싼 방에는 마당으로 나 있는 문이 존재하지 않으며,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브릿지의 문에는 별다른 캔틸레버나 계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브릿지와 마당은 오르내리기 조금 불편한 단차가 있다.) 그러나 동쪽의 작업영역에 포함된 마당들은 실내의 영역과 조금 더 '친밀하다'. 왜냐하면 작업실 기준 남쪽의 마당으로는 마당을 내다볼 수 있는 쪽마루가 존재하며, 쪽마루 위로는 캔틸레버도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업실 북쪽의 작은 마당은 담장이 외부와의 시선 교환을 막고 있어서 거주자가 편안하게 야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을 알아보면서 한편으로는 건축주 중 누군가가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는 프라이빗한 작업실을 원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위에 제시한 세 가지 생각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모형을 제작하였다.
4. 모형의 제작
우선 큐브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건축물의 실내 생활 공간들을 모두 4세제곱센티미터 크기의 정육면체로 표현하였고, 또한 건축물이 정육면체의 '유닛'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강조하고자 실내 생활 공간 이외의 보이드 공간(마당이 들어가는 공간) 또한 정육면체의 부피로 디자인하였다. 또한 서쪽의 생활 공간에 포함된 마당들은 4센티미터의 깊이를 갖도록 하였지만, 동쪽의 작업 영역에 포함된 마당들은 2센티미터로 그 깊이를 줄였다. 이는 마당을 둘러싼 주변 생활영역들과 해당 마당의 관계를 은유하는 장치이다. 서쪽의 생활 영역에서는 마당에 진입하기가 조금 어렵다. 즉 생활 영역의 마당은 어떤 공간이라기 보다는 갭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반면 동쪽의 작업 영역의 마당은 사용자에게 친숙하며, 공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한편 건축물로부터 모형의 형태가 결정되는 매커니즘을 유추할 수 있게끔 마당의 컨셉을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이미지를 출력하여 활용, 실제 건축물의 마당 각각의 컨셉과 위치를 반영하여 모형의 마당들을 표현하였다.
5. 프레젠테이션 준비
나의 결과물을 표현력 있게 전달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고민하는 과정에서 포스터의 양식을 생각해냈다. 포스터는 하나의 화면에서 이미지, 텍스트 같은 시각적인 표현을 활용하여 정보를 복합적,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아래의 이미지는 프레젠테이션에 활용한 포스터이다. 흰 벽에 작업물을 붙여 놓고 발표를 할 것을 고려하여 회색 종이를 바탕으로 결정하고, 왼쪽에 모형의 핵심적인 형태적 요소인 계단을 떠올리게 하는 실루엣과 매스와 매스를 잇는 브릿지를 'STAIRS and BRIDGE'라는 텍스트와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모형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크게 강조하였다. 또한 모형의 구상 단계에서 고려하였던 세 가지 키워드를 444CUBE, BRIDGE, GAP이라는 추상적, 함축적인 텍스트로 나타내고, 해당 키워드에 대한 설명을 빨간색, 하늘색 그라디언트가 있는 박스 안에 텍스트로 표현하였다. 한편 기존 수백당의 핵심적인 컨셉인 전통과 비움, 그리고 생활이라는 문구를 오른쪽 상단에 제시하고, 오른쪽 상단 구석에 수백당의 한자 표기를 각각 크롭하여 제시함으로써 레이아웃의 백그라운드로 활용, 수백당을 모형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강조하였다. 또한 포스터 중앙의 남은 공간에 GAP의 텍스트가 함축하는 '영역의 분리'의 개념을 모형의 간단한 다이어그램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모형의 입체적인 형태에 대한 힌트를 위해 모형의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판넬을 하나 더 준비하였다. 모형의 평면도와 단면도를 각각 3개씩 프리핸드드로잉으로 표현하여 A3 종이에 자유롭게 배치하고, 화면의 중앙에는 모형의 형태를 고민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백그라운드로 배치하였다.
6. 느낀 점
모형과 프레젠테이션의 완성에만 집중하다 보니 모형과 판넬의 전달력 면에서 미진하다는 평가를 들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기존 건축물의 컨셉에 대한 탐구는 철저하게 진행하여 모형의 컨셉은 충분했지만, 모형의 규모를 너무 작게 잡은 데다가 디자인을 다소 소극적으로 진행해서 모형의 컨셉이 제대로 다 담기지 못했다. 또한 프레젠테이션도 판넬의 배치까지 고민한 다른 학우들을 보면서 두 개의 판넬로 해결하려고 했던 점을 반성하였다. 다만 특색 있는 표현 방법이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충실히 반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