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신체, 그리고 기억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하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즐기는 본성을 갖고 있다. 철학자 리쾨르(P. Ricoeur)는 이것을 ‘줄거리 만들기(emplotment·플롯 구성하기)’라고 불렀다. 인간이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들은 불연속적으로 흩어져 있는데 그 경험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것, 즉 처음-중간-끝으로 이루어진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 인간 사고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은 서술(narrative)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의미화해 나간다. 이처럼 선택된 경험이 기억이라면, 그 기억 또한 건축의 재료가 될 수 있을까?
서울은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무대를 바꾸는 연극적 도시로 서울의 낡은 동네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재개발은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모하는 세트 교체와 같다. 도시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도시민으로 하여금 각기 다른 무대에서 서로 다른 배역을 수행하도록 만든다. 특히 요즘의 현대인들은 어느 동네에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연출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북촌, 이태원, 성수, 마포 등 정교하게 연출된 환상적 공간이 도시민의역할과 캐릭터성, 기획된 감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반면 영도는 사건의 조각들이 파편화된, 잊힌 백스테이지와 유사하다. 고립된 섬,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쇠퇴, 피난민과 어촌의 삶이 단편적인 서사로 남겨져 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절된 것이다. 이때 건축을 통한 기억의 복원은 인간의 과거뿐만 아니라, 자연의 회복과 생태적 변화를 수용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형성하는 복합적인 해석 역시 포함한다. 버려진 공간은, 사회적 맥락에서 소외된 인물들과 다를 바 없이, 단지 주목받지 못한 서사와 시간의 층위를 갖고 있을 뿐이다.
해당 프로젝트에서는 버려진 구조물과 건축물을 연결하고 도시와 자연 사이에서, 땅의 위와 아래에서, 산과 바다의 경계에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냄으로써 주변부로 밀려난 잊힌 것들이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임을 조명하고 회복시킨다.
개인적인 서사가 하나의 건축적 프로젝트로 확장되기 위해 건축은 단순히 기능과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틀을 넘어,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건축은 해석보다 먼저 몸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제공하며, 빛과 소리, 재료, 온도, 향, 분위기 등은 언어 이전의 감각으로 인식되어 지식 없이도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몸의 기억으로 남는다. 텍스트 또한 문화나 배경, 언어와 문법 같은 지식의 축적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지만, 독자의 지식, 경험, 시간, 언어에 따라 무한히 다른 방식으로 읽히며 동일한 이야기도 시대별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차이를 가진다. 따라서 건축은 언어 이전의 감각의 공통언어이자 인류의 상식common sense으로 작동하며 우리네 삶에서 기억을 구성하고 존재를 떠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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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 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칼 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천년 된 도서관의 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들에게 덧신게 했던 털슬리퍼의 까슬한 감촉이 떠오른다),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 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 한강의 『희랍어시간』 中
ON RENOVATION
People have always reused materials. Not for aesthetics, not to be sustainable, but simply because it made sense — because there was no choice, or because the material still had value. These decisions weren’t made for design; they were made for survival, for practicality. And yet, the results often speak more clearly than carefully planned architecture.
Thus, for me, renovation isn’t about making something look new. It’s about paying attention to what’s already there, and working with it instead of erasing it. Not everything has to match. Sometimes things that don’t match — old and new, rough and smooth — sit next to each other in a way that feels more honest. That’s where a different kind of beauty comes from. Beauty doesn’t come from everything matching. It comes from difference — and from care, from noticing what’s already there.
There’s nothing glamorous about reusing things. It’s about not wasting what already holds time and memory. It’s about letting materials speak in their own voice, even if they interrupt each other. That interruption can be part of the story.
To renovate something is to stay with it — to choose not to start over. It’s a form of loyalty, maybe. Or patience. Or just a refusal to pretend that only the new has va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