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관찰하라'는 과제의 주제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나무의 시각적인 특성(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 수종에 따른 나무 껍질의 형태 등)에 집중하였으나, 이후 시각적인 특성을 관찰하는 것으로는 여러 장의 스케치에 일관된 맥락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주제를 도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주제를 생각해낼 수 있을 만큼의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기계적으로 나무에 대한 관찰을 이어나갔는데, 다행히 그 과정에서 나무의 새로운 특성을 발견하여 이를 새로운 주제의 토대로 삼을 수 있었다. 그때 새롭게 발견한 나무의 특성은 바로 우리 주변의 나무가 일반적으로 인위적인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주 관찰한 캠퍼스의 나무들은 정말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심겨 있었으나, 결국 나무들의 위치, 또는 형태까지도 조경이라는 프레임에 의해 정해진다. 결국 나무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나무가 그런 위치에서 그런 모양을 취하고 있어야 인간의 입장에서 공간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 같은 발견 이후 나는 인간이 배제된 조건에서의 나무에 대해서도 궁금해졌고, 주변의 나무를 직접 관찰하기도 하고 기억 속의 나무를 관찰해보기도 하면서 '자연 상태의' 나무에 대해 탐구하고, 이를 '인위적인 관점으로 가공된' 나무와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한 가지 꽤 의미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인간에 의해 부여된 나무의 정체성은 일반적으로 나무의 객관적인 상태(나무의 크기나 형태, 종류 등)와 무관한 경향이 있는 반면, '자연 상태의' 나무가 다른 자연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얻게 되는 모습은 나무의 객관적인 상태와 분명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수종의, 비슷한 크기와 형태의 나무가 있다고 해도, 사람마다 갖는 인식의 차이에 의해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어떤 나무는 휴식을 위한 공간일 수도 있고, 어떤 나무는 국보로 지정되어 그 자체로 어떤 랜드마크로 기능하기도 한다. 반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다. 비슷한 형태와 크기의 나무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바람을 맞으면 같은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듯 비슷한 동작으로 움직인다. 또 오후 세 시 즈음 벽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는 날씨만 같다면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다. 나는 스케치 결과물에 나무의 이 같은 측면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어서 인간과 나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들은 흑백으로 나타내고, 자연과 나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들은 색조를 입혀서 둘을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게끔 했다.